





엄마가 돌아가셨다.
발인하고 나오는 길은 언제나와 같이 날씨가 좋았고, 그래서인지 류성우는 무너질 듯 울고 있는 아버지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저 건물 안에서 엄마가 하이, 하며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하이. 가볍고 가벼운 인사.
류성우와 류청우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맞이하던 '그' 언제나.
고작 트럭 기사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사, 따위로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성우는 한 달째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곧 추스르고 나오실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아는 아버지는 언제나 그리 단단한 사람이었고, 유약한 성정의 엄마를 지탱해주는 훌륭한 가장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술에 취해 손목을 그은 류청우와 함께 구급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제야 문득,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후비고 드는 것이 느껴졌다.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앞으로 예전 같을 수 없을 거야.
괜찮아, 괜찮다 달래는 할머니의 손이 제 등을 토닥였다. 류성우는 생각했다.
괜찮을 리가 없다.
이 상황이 괜찮아지는 날은 없을 거다.
그러나 놀랍게도, 퇴원한 아버지는 조금씩이나마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그리고는 어느 날, 마음을 추스르고 오겠다는 한 마디와 함께 덜컥 짐을 싸 일본으로 떠났다. 갑작스레 할머니 댁에 맡겨진 류성우는 그가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까 봐 한참이나 겁을 집어먹어야 했다.
물론 그런 개막장 스토리는 일어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일주일만에 집에 돌아와 전보다는 (아주 조금) 괜찮아진 듯한 기색을 보였다. 나름대로 바깥 출입도 하는 것 같고, 전처럼 코치 생활도 다시 준비하는 것 같고.
그렇게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들이 흐른 어느 날, 방학을 맞이한 류성우의 집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벨소리 대신 두어 번 노크를 하는 손길에는 이유 모를 예의범절 따위가 묻어났다. 지금 나가요. 큰 소리로 외치며 현관문을 연 류성우는, 이내 생각했다. 우와, 이 사람…
…진짜 엄마랑 닮았다.
요코하마블루스
/누렁쿤
꿈을 꿨다.
신혼여행으로 떠났던 요코하마의 푸른 꽃밭을 바라보던 날의 꿈이었다. 아내는 웃으며 수국 다발을 들었고, 문득 바람이 불었고, 꽃잎 몇 장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늦봄을 지나 초여름에 들어서는 때였다. 유독 푸르던 하늘 위로 번지던 푸른 수국 꽃잎이 마치 바닷속 물방울 같았다. 류청우는 그 방울 잡기 위해 손을 뻗었고, 다시 뻗고, 또 한 번 뻗고…
하염없이 허공을 휘젓다 못해 발밑이 쑥 꺼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비로소 잠에서 깨어났다. 울음이 쏟아졌다.
아, 나는… 나는 다시는 그 애를 못 잡겠구나.
너를 잡을 수가 없겠구나.
허공에 흩날리던 수국 다발이 원망스러웠다. 손틈 사이로 빠져나가던 물방울 따위가 다 죽은 아내 같았다.
요코하마행을 결심한 건 그 때문이었다.
털어내야지, 털어내고…… 살아야지, 어떻게든.
그를 위한 마지막 여정이었다.
- 우리 부모님 이혼했어. 아빠 안 계신다고 한 거 거짓말이야.
비행기에 올라 까무룩 잠든 한 시간 동안, 류청우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 지독하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는 뻑뻑한 눈을 뜨지 않았다.
- 내가 성격이 좀… 무르잖아. 우리 엄마 닮아서 그래.
신혼 여행을 떠나던 날, 그러니까 지금처럼 비행기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나눈 대화였다. 류청우는 그제서야 느릿하게 눈을 뜨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엄마도 결정적일 때 항상 의견에 힘이 없었거든. 그래서 아빠가 피곤해하는 게 좀 티났지. 나 중3 땐가, 학교 끝나고 신나서 들어왔는데 엄마가 갑자기 날 부르더라? 표정 보고 딱 알았어. 내가 눈치가 좀 빨라?
창 아래로 하얗게 눈 쌓인 후지산이 보였다. 6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눈 자국이 그득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초여름 볕에도 녹지 않는 걸 보면 저것도 지독한… 지독한 무언가의 잔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혼한다는데 아빠가 나랑 남동생을 다 데려가고 싶다고 했대. 엄마처럼 불안정한 사람 밑에서 애들 크는 거 못 보겠다고. 나한테 아빠 따라갈 거냐고 묻더라?
- 글쎄…. 아, 싫다고 했으니까 장모님이랑 사는 거겠네.
- 어, 당연하지. 나는 울 엄마 판박인데 누굴 따라가? 아빠 밑에 있다간 숨 막혀 죽었을 거야. 아빠 그날 나 보면서 엄청 화냈어. 지 엄마랑 똑같다고. 그게 되게 상처였나 봐. 그 이후로 그냥 누가 물어보면 아버지 안 계신다고 하고 살았어.
- 으음.
이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류청우는 한참이나 창 아래를 바라보다가, 다시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 나는 네가 무른 게 아니라 다정한 거라고 생각해.
- …….
-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해 주는 거잖아. 상처받을까 봐 쉽게 말 못 꺼내고. 나는 네 그런 점을 좋아해.
아.
승무원에게서 받았던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다 말고 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 우와.
- 우와?
- 내 남동생이 했던 말이랑 똑같아.
- 남동생…이 사람을 잘 보네.
- 걔는 결국 아빠 따라갔는데 어떻게 사나 모르겠다. 아빠가 아들은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싫다는 애 끌고 갔었거든.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도 몰라.
그리움에 잠식되던 눈이 떠올랐다. 그딴 흔적들이 남아서 류청우의 속을 긁어댄다. 나는, 네, 그런 점을, 좋아해. 류청우는 탄식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는 변한 게 없는데.
…변한 건 이 지독한 현실뿐이다.
[탑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나리타 공항에 착륙하오니……]
입국 심사는 짧았다. 배운 적도 없으면서 울적함에 산 담배에 불을 붙였으나 한 모금도 채 피우지 못하고 꺼트렸다. 일본에서 유명한 담배라더니 불이 타들어가는 색이 연한 분홍색이었다. 그냥,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그딴 생각만을 했다. 불이 예쁘네. 연분홍색이네.
도착한 리무진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류청우의 머릿속은 온통 연분홍색 불씨로 가득했다.
6월의 볕은 강하다.
제대로 채 오지도 않은 여름이 그의 등을 뜨겁게 달궜다. 청우는 수국 다발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이전에도 방문했던 유명한 정원은 푸른 꽃이 가득했다. 가벼운 가방에 안내 책자 한 권을 들고 나선 그는 하염없이 걸었다.
여기서는 사진을 찍었지. 여기서는 한참이나 꽃 구경을 했지. 그러다 와이프 발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어쩔 줄도 모르고 일단 등부터 내밀었더란다. 업힌 등으로 느껴지는 무게는 분명 존재했고, 류청우는 부끄러워 제 옆구리 사이로 흔들리는 발 같은 것들이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이건 사랑이구나. 10년을 만나고도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가 근처에서 파는 꽃다발을 건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꽃을 파는 여자는 혹시 한국의 양궁선수가 아니냐며 물어왔다. 신혼여행을 요코하마로 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너무나 반갑습니다. 공손한 일본어와 함께 유달리 예쁘게 포장된 푸른 수국 다발이 고왔다.
그리고 지금, 아내와 방문했던 꽃 가게의 점원은 바뀌어 있었다. 류청우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새삼스레 제 입으로 아내의 죽음을 설명하는 건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무척 잔인한 일일 테니까.
그렇게 먼 길을 하염없이 걸어 도착한 곳은 바다였다. 초여름 뜨거운 별과 함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저 멀리로는 우뚝 솟은 랜드마크 타워가 보이고, 그걸 가리키며 소란스레 웃는 연인들이 몇 차례나 스쳐 지나갔다.
“…….”
나는 혼자구나.
스스로가 혼자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철렁이는 건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청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벤치의 빈자리에 앉았다. 얕은 바람에도 수국 꽃잎은 한 장씩 흩날렸다. 이러다 집에 갈 쯤에는 다 사라지는 게 아닐까. 그런 부질없는 아쉬움 따위가 흘러넘친다.
그리고 그때,
문득 코끝을 스쳐 가는 향이 있었다.
비누 향, 혹은 옷을 잘 세탁해 좋은 볕에 말린 푸르른 냄새.
지나치리만큼 익숙하게 맡아온 향이 코를 자극해왔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옆자리에는 아내가 없고, 그저,
“…아.”
처음 보는 남자가 있었다.
앳된 얼굴이 이쪽을 돌아본다. 가지런한 눈매와 소년처럼 고운 선. 긴 속눈썹과 얇은 입술. 정돈된 머리카락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께의 떨림.
마치 죽은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류청우는 말도 안 되는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익숙한 향이 코를 찌른다. 그리고 류청우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남자는 류청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건조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훑고, 이내 손에 들린 수국 다발에 닿는다.
"저기요."
남자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청우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아, 한국인이네.
"그거, 혹시 꼭 필요하신가요."
그거.
남자가 지칭하며 가리킨 대상 역시 수국 다발이다. 류청우의 시선이 얕게 흔들렸다.
꼭 필요한가, 를 묻는다면 대답은 '아니오'다. 아내와의 추억이 떠올라 충동적으로 구매했을 뿐, 누구에게 선물한다거나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저한테 주시면 안 될까요."
"……."
"저한테는 꼭 필요한 거라."
질문과 설득이 필요한 문장들이나 대사에 간절함은 물론 높낮이조차 없었다. 왜 꼭 필요하실까요, 물으려던 입이 다물렸다. 오지랖. 여기서부터는 오지랖이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답변만 내놓으면 될 일인데.
눈앞의 남자는 죽은 아내와 닮았다. 비슷한 향을 풍기고 같은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한 눈빛만큼은 확연히 달랐다. 당연한 소리다. 저 남자와 류청우 사이에는 10년의 정도, 사랑도 없었으니까.
"네, 드릴게요."
낯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얼마만이더라. 류청우는 그런 따분한 생각을 하며 꽃다발을 건넸다. 그를 받아든 남자가 꾸벅 고개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청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양손으로 받아든 꽃에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향을 맡았다.
어차피 거기에 향은 없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린 청우는 언제나와 같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본인도 지금 깨달았을 텐데 굳이 짚어 줄 필요는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남자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그리고는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향이 안 나네요."
"하하… 원래 수국이 향이 없어요. 무성화거든요."
"그럼 냄새 맡는 척만 한 거네…."
영문 모를 소리였다. 나지막이 한 마디를 뱉은 남자는 곧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섯 발자국을 걸었다. 그 앞에는 난간이 있었고, 난간 아래로는 새파란 바닷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남자는 그 앞에 대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의미 모를 말, 의미 모를 행위. 이미 벤치를 벗어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그런 것에서 기인한 것일 거다. 류청우는 멍하니 남자가 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들고 있던 수국 다발을 난간 밖으로 뻗은 그는 곧,
"……?"
바다에 그대로 꽃을 떨어트렸다.
뭘까, 저거.
청우는 습관적으로 미소 짓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류청우를 향해 뒤돌아본 남자는…
"류청우 씨."
"……?"
"저랑 술이나 한잔하실까요."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문득, 더 이상 바닷바람은 불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제가 술을 끊은 지 좀 돼서요.
그리 대답하려던 찰나였다. 대뜸 쏟아지기 시작한 초여름 장대비를 피해 온 곳은 가까이 있던 류청우의 숙소였다. 호텔 방에 들어와 대충 물기를 닦고 옷을 갈아입은 류청우는 자신을 따라 달려온 남자의 이름을 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뚱한 얼굴로 수건을 받아든 그는 곧 박문대입니다,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묻는 말에는 어이없다는 듯한 답변이 돌아왔다. TV에서 봤는데요. 뻔하고도 당연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건 정체 모를 술자리였다. 비가 와서 멀리는 못 나갈 것 같고, 그냥 편의점에서 맥주나 사다 깔까요. 박문대는 그리 말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래 일본에 살던 분이신가 봐요."
맥주를 세 캔째 비워갈 쯤 류청우가 말했다. 박문대는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한 입에 들이키고는 담담히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으음… 아까 편의점에서 쓴 일본어가 자연스러워서?"
"어릴 때 잠깐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이쪽으로 출장을 오게 되셔서."
"아하."
정적 틈으로 새 맥주캔을 따는 소리가 울렸다. 치익, 탁. 류청우는 그가 맥주를 까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제 앞으로 들이미는 캔을 받아들었다. 고요한 호텔 방 안으로는 커다란 통창에 빗물 닿는 소리만이 들렸다. 류청우는 이 상황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참 이상하지. 양궁 활을 처음 잡았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류청우는 한 번도 낯선 타인과의 접촉을 즐긴 적이 없었다. 인터뷰를 핑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친한 척하는 사람들이나, 기특하다며 길에서 대뜸 머리를 쓰다듬던 사람들이나, 팬이라며 무작정 다가와 말을 걸고, 아는 체하고, 끌어안고, 악수를 청하는……
아아.
그러고 보니 꽃을 달라는 사람은 처음이었지.
그게 이 낯선 접촉을 수용한 이유인 건가? 홀로 생각하며 맥주를 들이킨 류청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질문을 던졌다.
"꽃은 왜 바다에 풀었어요?"
"보통 왜 달라고 했는지부터 묻지 않나."
"하하… 대답해 줄 거면 물어볼게요."
박문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죽어서요."
"……."
"보내주고 싶은데 꽃이 없길래. 그 꽃다발이면 그래도 좋아할 것 같아서."
"……."
"답변이 좀 됐을까요."
고개를 든 건 쓸데없는 동질감이었다.
낯선 땅. 낯선 공간.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 그리고… 쓸데없이 알게 된 같은 처지.
공유하지 않았으나 공유된 듯한 상황. 술기운이 불러온 제 추억 따위가 류청우의 가슴을 휘저었다. 느릿하게 눈을 껌벅였다. 고작 맥주 네 캔째에 취할 리 없었으나, 울컥거리며 넘어온 울음이 그를 취하게 만들었다. 올곧게 따라붙는 남자의 시선이 목구멍에 턱턱 걸리는 것 같았다. 류청우는 울음을 뚝뚝 흘려대면서도 습관적으로 웃었다. 입꼬리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아마, 돌이켜 보자면 그만큼 기괴해 보이는 얼굴이 없었을 거다. 류청우의 목울대가 크게 넘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침이었다.
얼마 마시지도 않은 술에도 숙취는 존재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을 때, 류청우는 맨바닥에 담요도 베개도 없이 제 팔을 베고 누워 잠든 박문대를 발견했다. 어라, 하는 짧은 감상이 일었다.
그냥 먼저 주무세요, 제가 적당히 치울 테니까.
간밤에는 한참이나 울어댄 탓에 정신이 없었다. 새벽 세 시가 되었을 쯤에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류청우가 답지 않게 허둥대며 상을 치우기 시작했을 때, 박문대는 저리 말하며 그를 침대에 눕혔다. 뭐라 반박하려던 순간 돌아온 건 뜨끈해진 눈 위로 올라온 작은 손바닥이었다. 마치 훤한 불빛을 가려주기라도 하려는 사람 같았다.
탁, 하고 침대 옆 스탠드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 좋게 열감을 가라앉혀주던 찬 손이 곧바로 떨어지고, 감고 있던 눈을 다시 뜨기도 전에 방 불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류청우는 그대로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옆에서는 사락거리며 박문대가 호텔 방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대로 찾아온 건 깊은 수마였다.
"하하, 미쳤네…."
대뜸 울어버린데다 정말 아무것도 치우지도 않고 홀로 침대에서 잠들어 버렸다.
침대에 올려주진 못해도 이불은 덮어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던 순간, 바스락 소리에 잠에서 깬 박문대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 잠귀 예민한 편인가 보네. 고요한 생각이 스쳐간다. 그와 동시에 마주친 시선 사이로, 류청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해장…할 거리는 없겠지만 식사라도 같이 하실래요?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일본의 식사는 대부분이 달거나 심심했으며, 간밤의 알콜을 날려줄 정도로 개운하지 못했다. 결국 편의점에서 그나마 칼칼해 보이는 컵라면을 사 온 둘은 어색하게 호텔 방에 앉았다. 정적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쪽은 박문대였다.
"오늘… 원래 여행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오늘요? 음, 크게 정한 건 아니었는데…."
"그럼 제가 안내라도 좀 해 드릴까요."
류청우는 그저 눈을 껌벅였다. 의외의 소식을 접한 탓에 머리에는 물음표가 떠 있었다. 그는 곧, 어제밤부터 내내 궁금했던 부분을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혼자 오신 건가요?"
"예."
"원래 문대 씨…도 원래 계획이 있지 않으세요? 혹시 어느 호텔에 묵고 계시는지,"
"호텔은 아니고 아버지 집에 있습니다. 이 근처 사셔서."
"아버님 댁이요?"
박문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출장을 자주 오셔서 그냥 집을 하나 마련하셨거든요. 온 김에 거기서 지냅니다."
아하. 마음을 비우러 홀로 여행이라도 온 건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류청우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힐끔 고개를 들면 눈이 마주친다.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어제 처음 만난 박문대라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사람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지금처럼 사소한 질문을 주고받을 때조차도 그랬다.
이상한 사람이다.
어제는 감상에 젖어서, 술기운에 취해서 그렇다고 치자.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은 언제나 답지 않은 짓을 하게 되곤 하니까. 그러나 감상에 젖을 수도 없이 컵라면을 후루룩 먹고 맨정신으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지금은 왜 그에게 '이만 가달라'고 말할 수 없는 걸까.
다시 시선이 마주친다. 류청우는 어제 느꼈던 기시감이 다시 고개를 든다고 생각했다.
박문대의 가지런한 눈은 죽은 아내와 꼭 닮았다. 긴 속눈썹도, 얇은 입술도, 이렇게 나란히 앉으면 보이는 고운 선 같은 것들까지도. 어쩌면 자신은 그에게서 발견한 아내의 흔적을 갈구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차마 내보내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박문대는, 어째서 여길 떠나지 않는 건데?
의문이 깊어지기도 전이었다. 마주친 시선은 류청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고, 그는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려 상황을 모면해야만 했다. 그에 박문대가 말했다.
"일주일 정도 계신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
이번에는 어떻게 아셨어요,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어제 술을 마시며 자신이 나불나불 설명한 부분이었기에.
"그동안이라도 동행하실까요."
그리고 이에 대해서도 거절할 핑계 따위는 없었다.
*
박문대는 요코하마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어릴 때 잠깐 있었다더니, 커서도 아버지가 머무는 집에 종종 들렀던 모양이었다. 장소를 지나며 우와, 하고 작게 감탄할 때마다 능숙한 설명이 따라붙었으니까. 류청우는 신기하다는 듯 그의 설명에 감탄할 뿐이었다.
"문대 씨는 여기, 설명할 일이 많으셨나 봐요."
근처 카페에서 식사를 하는 도중에는 이렇게 물었다. 박문대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냥… 연습을 좀 했습니다."
"연습?"
"설명해 주고 싶어서요."
"어… 누구한테요?"
그럼 또 대답은 않고 어깨를 으쓱이는 거다. 웃음기라곤 없는 얼굴이 그런 식으로 대화를 피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박문대는 곧바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처음 오는 사람한테 이렇게 설명해 주면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잖습니까. 그걸 해 주고 싶었어서."
"아, 뭔지 알 것 같네요."
생각해 보면 류청우도 비슷한 짓을 했었다. 신혼 여행을 떠나기 직전, 와이프와의 여행을 위해 요코하마 안내 책자를 구매해 한참이나 읽어보곤 했으니까. 물론 방문한 카페는 문을 닫았고 기껏 찾아간 명소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구경을 할 수 없었다. 아쉬움은 가득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었으니까.
그럼 역시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 주고 싶었던 걸까.
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인 듯해 함부로 물을 수는 없었다. 류청우는 조용히 박문대에 대한 것들을 가늠하며 미지근한 물을 마셨다. 비어버린 잔에는 곧바로 새로운 물이 조르르 담겼다. 물을 따르는 박문대의 시선은 여전히 류청우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이 지나치게 집요하다고 생각했다.
류청우가 기획한 일주일간의 여행은 생각보다도 괜찮았다.
슬픔을 어느 정도 갈무리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면, 충분히 달성했으니 말이다.
언제나와 같이 아내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류청우의 머릿속에서.
그때마다 울음을 흘리고 술로 버텨내는 게 지난 시간동안의 방식이었다면, 요코하마에서의 일주일은 박문대의 집요한 시선을 떠올리는 것이 그 방식이었다.
아내와 꼭 닮은 눈. 그러나 눈앞에 머무르고 있는 건 아내가 아닌, 훨씬 더 담담하고 조용하고 무뚝뚝한 남자였다. 그 가지런한 시선이 닿을 때면 울렁이던 슬픔이 가라앉는 듯했다. 토기처럼 목구멍에 어려오던 울음기가 스르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류청우는 그게 썩, 괜찮은 치유법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 정도로.
"문대는 한국에 언제 돌아가?"
여행 사흘째에 말을 놓게 된 류청우가 물었다. 박문대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흠,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형이 한국 갈 쯤 저도 가죠 뭐. 언제나처럼 담담한 답변이었다. 류청우는 그 무계획한 발언에 아하하, 하고 웃었다.
박문대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대뜸 나타나 대뜸, 꽃을 가져가더니 대뜸… 일주일간의 동행을 요구한 사람이니까. 귀신처럼 제 우울을 집어삼켜주고도 뚱한 얼굴로 담담히 앉아 있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제가 한국에 갈 쯤 따라서 비행기 표를 예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일정 정해지면 알려줘. 한국 가서도 만나자."
처음 만나던 날처럼, 호텔 방에 앉아 맥주를 깐 류청우가 그리 말했다. 박문대를 바라보고 있던 캔에서 눈을 떼고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형은 저랑 한국에서도 보고 싶어요?"
"응? 그럼 좋지. 문대 좋은 사람이잖아."
"형도 뭐, 좋은 사람이니까 저도 좋긴 해요."
박문대가 다시금 웃었다. 대화하다 한두 번씩 피식거리긴 하던데, 오늘처럼 연속으로 웃어주는 건 처음이다.
기분이 좋은가. 류청우는 그리 생각하며 박문대를 따라 싱긋 웃었다.
"그래도 한국 가면 서로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문대는 그렇게 생각해?"
"형이나 저나 좋은 이유로 만난 건 아니니까요."
물론 웃음은 얼마 가지 못해 멎었지만.
새로 만난 인연에 나름대로 잔잔히 기뻐하고 있던 류청우의 입꼬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좋은 이유. 좋은 이유로 만난 건 아니니까요.
그가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안다. 류청우 역시 자신의 사별이 기사화되어 SNS에 도배된 것을 본 적 있으니까. 박문대는 자신이 아내와 사별했음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박문대 역시 가족을 잃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동질감.
그 사소한 감정이 뭐라고 되도 않는 유대감을 느꼈다.
류청우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박문대에게 있어서도, 류청우에게 있어서도, 함께 지낸 일주일이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로 인해 위로받은 것처럼 그 역시 나로 인해 위로받았을 거라고. 낯선 타인과 함께한 이 일주일은 그런 시간이었다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에 대한 위로가 끝났으니 다시 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저 발언이 미묘하게 서운했을 뿐.
류청우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래, 그럼…."
"……."
"그렇게 하자."
일주일간 잊고 있던 상실감이 다시 고개를 드는 듯했다.
류청우는 애써 밀려오는 울음기를 꾸역꾸역 삼켜낸 채 눈앞에 놓인 맥주를 들이켰다. 첫날과도 같은 취기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꿈을 꿨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눈앞이 도는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류청우는 정신없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잠깐이라도 일어나야겠다. 그리 생각한 류청우가 더듬거리며 침대 옆을 짚었다. 그리고 그 순간, 류청우의 옆에 누워 있는 건…
"……."
아내와 꼭 닮은 눈을 한 박문대다.
류청우는 멍하니 일어나 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호텔 방은 고요했다. 벽 한쪽을 채운 통 유리창 너머로 가득한 야경의 불빛은, 류청우의 진한 취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오히려 비상사태를 알리듯 번쩍이며 머릿속에서 점멸할 뿐. 정신없는 와중에도 울음이 쏟아졌다. 박문대의 몸을 짚고 있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는…"
"……."
"너는, 너까지, 사라지면, 나는……"
나는 또 어떻게 버텨야 하니.
파들거리던 손이 결국 그의 옷자락을 쥔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우울이 응어리 진 채 뚝뚝 흘러내린다. 류청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애처롭다고 생각했다. 무엇도, 무엇도 홀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껏 자리잡은 피딱지를 정체 모를 무언가가 다시금 뜯어낸 거다. 피가 터지고 울음이 터진다. 류청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꼈다. 그리고 그때, 손이 닿아 있던 박문대의 몸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울음에 젖어 있던 그의 뺨 옆으로 박문대의 손이 스친다. 눈물이라도 닦아주려는 걸까. 그리 생각하며 그를 밀어내려던 류청우는, 박문대의 손이 뺨이 아닌 제 뒷목을 그러쥔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뻑 젖은 얼굴이 고개를 든다. 시선이 마주친다.
"……."
아내를 닮은 눈.
분명… 모든 안정감의 이유를 그곳에서 찾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눈빛은 이제껏 느껴오던 무언가와는 지나치게 달랐다. 지금까지 안정감을 느껴오던 것이 전부 거짓인 양, 류청우는 잡힌 뒷목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문대야. 언제나와 같이 부르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굳어버린 눈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던 박문대는, 그리고, 이내, 곧,
…입을 맞춘다.
맞닿은 입술은 차가웠다.
이상하지. 요코하마의 초여름은 후덥지근해서 밀려오는 더위를 참을 수 없다고 했는데. 닿아오는 살은 차갑기만 했다. 마치 류청우의 모든 열감을 식히기 위해 존재하는 몸 같았다.
문대야. 부르는 소리는 그의 혀를 타고 먹혀 들어간다. 이게 아닌데. 이건, 이건. 그리 생각하면서도 울음에 온통 뜨끈해진 몸은 그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한 번만 더.
호흡을 위해 떨어진 틈을 다시 파고든 건 류청우였다. 힘을 준 채 뒷목을 붙들고 있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간다. 뺨에 묻은 눈물을 닦아내는 행위를 인지하고서야 여즉 제가 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류청우는 멈추지 않고 그의 숨을 갈구한다. 문대야 가지 마. 떨어지지 마. 떨어지면 나 정말, 너까지,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물 속으로 잠식하는 기분이다.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초여름 열기 위로 박문대라는 물이 끼얹어지고 있었다.
나는 미친 사람이야. 나는 밀려오는 우울 하나 감당하지도 못해. 나는, 나는 앞으로도 더 무너질 거야.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류청우는 난생 처음으로 제 살을 깎아 먹으며 그리 말했다. 단 한순간도 낮은 말을 뱉은 적 없던 인간이었기에 그 좌절감은 더했다. 온몸이 흔들린다. 몰아치는 행위 속에서 류청우는 연신 바닥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류청우의 허리를 끌어올려 안은 박문대는 말했다.
저는, 형 그런 점이,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 나는 네가 무른 게 아니라 다정한 거라고 생각해.
덜컥 겁이 났다.
박문대의 말 위로 아내의 목소리가 겹쳐들고 있었다.
쉽게, 마음 주고, 그걸로, 상처 받고.
그거, 나쁘지 않아요.
- 상대를 배려하고 생각해 주는 거잖아. 상처받을까 봐 쉽게 말 못 꺼내고. 나는 네 그런 점을 좋아해.
저는, 형, 그런 점, 좋은데요.
부드럽게 이어져야 할 말이 조각조각 깨진 채 귓가에 파고든다.
류청우는 겹쳐오는 아내의 목소리를 잊기 위해 팔을 뻗었다. 박문대의 목에 팔을 감는다. 다시금 겹쳐지는 입술 사이로, 허덕이는 거친 숨이 오갔다. 울음. 다시 또 울음. 류청우는 가라앉는다. 무저갱 속으로, 더. 더.
아침이 밝자마자 잠든 박문대를 놓고 호텔을 떠난 류청우는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저녁으로 잡혀 있던 비행기 표를 취소하고, 두 배 값을 지불해 가장 빠른 항공편을 잡아 그대로 떠났다.
다시는, 다시는 볼 일이 없어야 했다. 서로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한국 가면 서로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말하던 박문대의 대사는 사실이었으니까.
애써 코치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주변인들은 잘 추스르고 털어냈다며 류청우의 어깨를 토닥였고, 그는 언제나와 같이 습관적으로 웃었다.
그렇게 지난 시간이 무려 2주였다. 류청우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루틴대로 우편함을 확인했다. 전달된 청구서에는 남자 둘이 사는 생활답게 저렴한 금액이 띡 찍혀 있었다. 음. 류청우는 그대로 아파트 공동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
아니, 들어서려고 했다.
우편함에 담긴 또다른 봉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류청우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겉봉투의 발신인에는 읽을 수 없는 약체 한자가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이 봉투는.
박문대가 보낸 거다.
봉투를 뜯는 손이 떨려왔다. 겨우 가라앉았던 잠잠함이 스멀거리며 고개를 드는 듯했다. 류청우는 그대로, 안에 담겨 있는 인화된 사진 두 장을 꺼냈다.
"……."
푸른 수국 다발을 들고 있는 어린 시절의 아내.
향도 없는 꽃에 코를 파묻고 있는 사진은 분명, 신혼여행에서 보았던 장면과 엇비슷했다. 문득,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는, 아내와 함께 앉아 뚱한 얼굴을 한 어린 시절의 박문대가 있었다.
- 내 남동생이 했던 말이랑 똑같아.
욱.
류청우는 입가를 손으로 막았다. 토기가 밀려올 것 같았다. 황급히 시야에서 사진을 치운 류청우가 그대로 집앞까지 달려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아내의 생일.
그 여섯 자리 숫자를 누른 손이 급박하게 현관문을 연다.
그리고 마주치는 건, 당연하게도…
"…안녕하세요."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는 박문대였다.
류청우는 그대로 주먹을 쥐고 섰다.
아아. 가장 절망적이고 지독한 건, 지금 류청우의 속을 휘감는 것이 절망보다 안도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류청우는 손에 쥔 사진을 구겼다. 하하, 하. 헛웃음이 터지는 사이, 박문대가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걸어오는 것은 안정감이 아닌 폭풍이다. 류청우의 평안을, 안정을, 미련맞은 우울을 전부 집어 삼키고도 씹어버릴 폭풍.
그리고 류청우는 눈을 감았다.
안쪽에서 저를 부르는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